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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

우리나라 산성

by 꽃담비 2016. 9. 12.

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추석에 가족들과 차례를 지내고 가 볼만 곳을 알아볼까요. 선선한 바람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만든 건축물과 함께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우리나라 산성축성술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고 있다. 남한산성의 지리적인 여건을 보고 『여지도서(黎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 하였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拷ㆍ峰)이라고 하였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8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내부가 넓고 평탄하며, 80여 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여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구조적으로도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城郭)이 갖추어야 할 구비시설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본성외에 봉암성, 한봉성 등 2개의 외성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가 있다. 원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루를 설치하여 화포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에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女墻)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와 숯을 묻어 둔 매탄처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성축성기법의 교과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최근에는 각종 역사 드라마가 산성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남한지(南漢志)』에서는 남한산성의 규모를 본성 성벽의 안 둘레는 6,290보(步)로 17리(里) 반(半)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군데의 군포, 4군데의 장대(將臺)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둘레를 환산하면, 한 자(尺)의 길이가 20.81cm인 주척(周尺)으로 안 둘레는 7,854m이고, 바깥둘레는 9,10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벽 외곽 기단부를 기준으로 하는 것과 여장 안쪽 기저부를 중심으로 하는 것,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데 그 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이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다.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는 둘레가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12만 6,637㎡이다. 부속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km에 달한다.

남한산성엔 각종 행사가 이루어 지며 남한산성 행궁 해설 안내도 받을 수 있다.

<남한산성 세계문화센터>

    

수원화성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남수문 2012년 6월 복원 완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문화제단>

  공주공산성

  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패색 짙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장으로 5대왕 64년의 백제 웅진사 써내려간 곳이다. 고구려에 맞서 영토를 지키고, 중국과 일본 등 외국과 활발히 교류한 해상왕국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백제. 그러나 475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도성인 한성이 함락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개로왕의 뒤를 이어 백제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공산성은 백제의 도성이 된다. 백제 웅진의 64년 도성이 된 공산성은 백제 이래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세월과 시대의 변천을 겪어 온 역사의 장으로 그 세월만큼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공산성 성내에는 백제 때 건물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산재해 있다. 조선 인조대왕의 일화가 전해지는 쌍수정 아래 광장은 백제의 추정 왕궁지. 성의 동쪽에 있는 임류각지의 발굴로 성내에 백제왕궁지가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공산성의 관문역할을 하고 있는 금서루는 공산성의 서문이다.조선시대에는 공북루와 진남루가 주요 출입문이었다.

공산성은 성의 어느 방향에서 올라서더라도 성에 올라 성벽길을 따라 가면 발밑이 도심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산성의 정취에 푹 빠져든다. 성벽길을 걷노라면 때로는 급하게 내려가 걷는 이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고, 급하게 솟구쳐 숨을 허덕이게 하기도 하지만, "힘들다" 타박할 새가 없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내어놓는가 하면 멋스러운 전통 문루건축물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주 관광을 즐기면서 공산성 성벽을 걷고 있는 한 가족. 안팎으로 아름다운 고성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공산성이다. 사진과 같이 성의 일부는 토축성이 남아있어 백제 고성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성의 북동쪽 성벽에서 바라본 신관동 일대. 공주사람들이 강북이라 부르는 신시가지가 들어서있다.

금서루에 올라 우측 성벽을 따라 가면 구불구불 완만하다가도 때로는 급하게 흐르듯 이어지는데, 굳이 안내를 받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진남루, 동문루, 연지와 만하루, 공북루 등 조선시대 문루건축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 특히 성의 북쪽 곳곳은 금강과 어우러진 공산성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성벽을 거닐다 보면 만나는 문루건축물 외에도 공주시가지 전경이 눈에 들어오고 금강이 발 아래 흐르는가 하면 강 너머 공주시가지가 조망되기도 하는 등, 좋은 경관이 불쑥불쑥 나타나 성밖의 경관 또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공산성이다.

성의 북서쪽 언덕에 위치 한 공산정. 공산정에 오르면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있어 눈맛 시원한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조선시대 공산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공북루. 배를 타고 도강을 하여 이 문을 지나면 진남문을 거쳐 삼남대로가 이어진다. 산성 만하루와 연지. 연지 위 누각은 왕과 문무백관들이 풍류를 즐겼을 법 한 상상을 떠오르게 한다. 만하루 뒤로 성은 이어져 공북루에 이른다. 공북루에서 공산정으로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다. 왼쪽으로 연미산 가까이 보이는 철교가 6.25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폭파했던 금강철교다.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왔을 때 머물렀던 쌍수정. 백제 웅진시대의 추정왕궁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추정왕궁지 연못의 봄. 왕궁의 연못답게 매우 크다.

백제군사 체험의 장 공산성 공산성은 웅진성수문병교대식이 치러지는 시기에 가면 더욱 좋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7,8월의 우기만 제외하고 매주 토, 일요일에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이 치러지기 때문.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 정각에 교대식은 계속된다. 수문병 교대식 때 사용되는 휘장과 창을 든 수문병들이 금서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모습은 성의 웅장함을 한층 높여 보는 이에게 흥미롭고 인상적인 추억을 안겨주고 있다.웅진성수문병교대식이 열리는 날에는 부대행사로 금서루 뒤쪽에 백제의상을 전시해 놓아 원한다면 왕과 왕비의 옷을 입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고, 활쏘기와 투호 놀이 등 관광객이 다양한 전통오락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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