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민속마을로 떠나보신 것은 어떨까요.
외암민속마을
설화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외암마을은 왜 외암이라고 불리웠을까? '외암'이라는 마을 명칭을 외암리의 서쪽에 있는 역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 역말에 조선 초기부터 이미 시흥역이 있었고, 외암마을은 이 시흥역의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라서, 오양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외암마을은 예안이씨 중심으로 구성 된 마을이다. 마을 앞쪽으로 넓은 농경지를 두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막아주는 사이의 구룡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이 처음에는 넓은 농경지로 인해 자연발생적인듯 하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예안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인물이 나타나자 점차 예안이씨 후손들이 번성하여 집성마을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를 건너면서 약한 구릉지에 집들이 길을 따라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은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나무가지와 같이 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 열매가 맺어 있는 것과 같은 자연형태와 같은 마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마을이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원칙이 있다. 즉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을 주산이라 하는데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긴 선이 이어지는 축선에 일정한 영역을 만들어 그 영역 안에 집들을 배치해 두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집이 앉은 방향은 거의 서남향이다
외암 마을에도 물은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 외암마을에서 물은 크게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형태로 보는 물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형태로 보는 물이다. 자연적인 형태로 보는 물을 설화산 계속에서 마을 옆을 지나 하부로 흘러가는 실개천을 말하는데 풍수에서 이를 내수구(內水口)라고 한다. 인공적인 물은 마을 상부에서 물길을 인위적으로 터서 마을 안을 통과하도록 만든 물길이다. 이 물줄기는 마을 내 여러 집들을 통과하면서 생활용수로 쓰이고 마당을 지나면서 곡수(曲水)와 연못을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주기도 한다. 이 인공수로를 풍수에서 '염승(厭勝)'이라고 한다. 전통 오행(五行)사상에서 화(火), 물(水)은 서로 상극이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雪火山)의 발음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과 같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마을에 그 '화'의 기운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을내부에 화와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화'의 기를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스스럼없이 적응해 나가기 위한 선조들의 빼어난 착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외암리 마을에서는 자연적인 건축요소를 활용하는데 있어 하나는 그대로 둠으로서 자연을 살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인위적으로 이용함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출처 :외암마을>
외암민속마을은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루쯤 고즈넉한 곳에서 쉬어감도 좋을 듯합니다.
외암민속마을 찾아가는 법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9번길 13-2
낙안읍성
삼한시대 마한땅, 백제 때 파지성, 고려 때 낙안군 고을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 객사, 임경업장군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에 지정되었다. 조선 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다른 지역 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 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길이가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3개 마을 생활근거지를 감싸안은 듯 장방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가까운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많은 세대가 실제 생활하고 있는 민속 고유의 전통마을로서, 민속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문을 비롯 서, 남문을 통해 성 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며(사극 용의 눈물, 태조왕건 등 촬영장소) 용인, 제주민속마을과 같은 전시용이나 안동 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닌,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이기에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친다. 남부 지방의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호박넝쿨이 어우러져 술래잡기하며 뛰놀던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을 연상케 한다.
낙안읍성을 가면 우너하는 체험활동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가야금 체험, 대장간 체험, 누에체험, 서당체험, 상례체험, 세계의 상 체험, 전통의상 체험,민속영화관 체험, 대장금세트장 체험,국악당 체험, 길쌈체험, 천연염색체험, 큰샘/빨래체험, 대금(전통악기)체험, 소원지. 엽서체험, 옥사체험, 짚풀체험, 한지체험, 강태공 낚시체험, 두부/ 메주체험등이 있다.
낙안 읍성 찾아가는 법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의 역사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조 태종 10년(1410년)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조선조 세종 5년(1423년) 이곳으로 옮겨진 이래 500여 년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정의현은 태종 16년(1416년)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종을 축성 하였었으나, 현청이 동쪽에 너무 치우쳐 행정상 불편할 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고 또한 우도가 가까이 있어 외적으로 부터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안무사 전관이 건의하여 세종 5년(1423년), 당시 진사리(현 표선면 성읍리)로 현치를 옮기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일명 진사성이라고도 불리었던 정의성은 축성을 시작한지 5일 만인 세종 5년 정월 13일에 총 둘레 2,986척, 높이 13척의 규모로 완공되었는데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다. 숙종 28년(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정의현의 당시 민가 호수가 1436호, 전답이 140결, 성수비군이 664명, 말 1,178필, 흑우 228수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읍성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1423년 이후부터는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평범한 농촌마을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1915년 5월 1일부로 제주군제도 마저 폐지되고 도제가 실시되면서 정의고을이었던 성읍은 표선면 면소재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의 표선면은 1935년 동중면이 개칭된 이름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읍민속마을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며 문화재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었고, 이어 1984년 6월 총 1,425필지 3,191,711㎡의 면적이 중요민속자료 188호 국가지정문화제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9월에는 보호구역이 935호 국가지정문화제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9월에는 보호구역이 935필지(790,747㎡)로 축소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민속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성읍민속마을에서는 매년10월에 남문앞 광장에서 초가집줄놓기, 전통혼례식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개최된다. 1994년부터 정의골민속마당축제로 승화시켜 주민화합도모와 관광발전,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는 풍성한 볼거리와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맷돌 및 빙떡 ,곡식을 가는데 쓰는 기구로 둥글고 넓적한 돌 두 개를 포개고 위에 있는 구멍으로 갈 물건(곡식)을 넣어 위짝을 돌려서 갈게 된다. 예로부터 우리 고장에서는 맷돌을 이용해서 콩, 보리, 메밀 등을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로 떡이나 빙떡을 만들어 먹을 적에 이용하였는데 이웃주민들이 맷돌을 함께 돌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노동을 하였다.
감물들이기, 무명이나 광목으로 만든 옷에다 8월쯤 감씨가 여물 무렵에 풋감을 따서 으깬 감즙으로 물들이며 이러한 옷을 흔히 갈중이로 불리운다.
촐베기, 촐은 꼴의 제주방언으로 봄에 산이나 들에 방목시켜 놓았던 소나 말들을 가을에 집으로 들여 와 그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베어내 집으로 운반하고 마당이나 뒤뜰에 쌓아두게 되는데 이 일을 촐베기라고 한다.
성읍민속마을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는 잊혀져가는 지역의 고유하고 독특한 전통문화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민요체험으로 오돌또기, 맷돌노래, 산천초목, 봉지가등, 물허벅, 장구등이 있고, 오메기술 체험,(이론 및 동영상교육- 누묵만들기- 오매기떡만들기 및 누룩만들기- 발효과정- 오메기술) , 고소리술 체험(이론- 누룩만들기- 밑술담기(고두밥찌기, 숙성)- 덧술담기(밑술과 혼합하기)- 고소리술내리기 및 빚은술시음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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