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 황진이, 벌써 10년이 다되어간다. 송혜교 주연의영화 황진이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한다 해도 변화지 않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난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 영화를 상영할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하는 이유도 역사속의 황진이 책을 읽은 후라 그녀의 삶이 영화로는어떻게 그려질까하는 궁금함도 있었지만 송혜교의 아름다움과 그때만해도 한복이라는 것은 정형화되어 있었던 때라 송혜교의 황진이 한복은 내게는 파격적으로 다가와서 였고 또한 그녀의 사랑을 어떻게 담아 냈을까하는 궁금함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역사상으로 황진이가 기녀가 되기전 사료는 없다고 한다. 다만 그녀의 출생이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들이 더 많다.그리고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적인 것은 그렇다하고 영화 황진이는 별당아씨로 시작한다. 혼인을 앞두고 있었으니 파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황진이는 그때에 자신의 출생을 알게되고 그리하여 기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16세기 사회에서 기녀라 함은 유교적 사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천한신분이었음에도 그 길을 택한 그녀는 양반에 대한 권력에 대한 원망이 컸으리라 본다. " 세상을 내 말 아래에 두겠다"는" 나는 세상이 두렵지 않다"
무언가 지키고자하는게 있을 때 그것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므로 두려울게 없어지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그녀가 택한 삶은 지키켜야하는 것을 잃어버림므로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송혜교의 황진이는 기생의 이야기라 자칫 천하게 그려질 수 있었지만 그녀의 총명함과 예인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춘 듯 했다. 그녀의 한복은 그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검정색, 초록색 등을 사용함으로써 화려함보다는 기품있는 화려함은 택해 그녀의 시서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황진이의 작품들
1.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 모르던가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라 하노라
2.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3.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님이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내어
그 밤에 오래오래 새게 이으리라
4.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5. 산은 옛날의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의 물이 그대로 있겠는가
종일토록 흐르니 옛날의 물이 그대로 있겠는가
사람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는구나
황진이의 시조는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조들이 많은데 영화에서는 그런 황진이의 마음보다는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뜨린 양반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비웃어주는 것들에 초점이 더 강하다. 고고하다는 양반들의 속내를 비웃듯이 소복여인으로 그를 유혹해 그의 다름은 비웃듯이 , 영화는 그렇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내가 그린 영화와는 조금 달랐다. 황진이의 사랑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은 황진이의 시조들에서 느껴야겠다. 송혜교의 황진이는 한복의 고고한 아름다움과 송혜교의 기품있는 모습 화려한 영상미 그것들로 만족해야하는 영화였다.
그밖의 황진이와 서경덕이야기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러 갔다 유혹을 하지 못하고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서경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화담 서경덕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나물을 뜯으러 내보내면서 서경덕은매일 빈 바구니만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 왜 나물을 한 줌도 뜯어오지 않느냐?" 하고 묻자 "나물 뜯으러 들판에 나가니 종달새가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달새가 그제는 땅에서 1치쯤 날아오르더니 어제는 2치쯤 날랐고 오늘은 3치쯤 날아올랐습니다. 새가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서경덕은 늦은 나이인 14세에야 개성의 어느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16세에는 <대학>을 읽은 뒤 그 뜻을 깨닫고 기쁨에 겨워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다음에는 제자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았다가 남명조직을 만나게 된다.하였다.
서경덕은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 즉 '꽃 피는 연못'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연유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스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서당에서 겨우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서경덕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과 책이었다. "스스로 깨달아 얻은 즐거움은 결코 다른 사람이 짐작 할 바가 아니다."라고 입버릇 처럼 말한 서경덕은 그런 연유로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 후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개성 일대와 서울에서 수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렀는데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제자들 중에 빼어난 여류 시인이자 절세미인이었던 황진이가 있다. 황진이는 대제학을 지냈던 소세양과 1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정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한 뒤 화담 서경덕을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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