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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비의 일상/책 리뷰 & 정보

영화 사도

by 꽃담비 2016. 9. 2.

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작년 이맘때 즘 개봉했던 영화가 있었지요. 영화의 주제기 된 사건은 드라마에도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는데요. 영화 사도는 그 동안 보여왔던 극과는 조금 다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사도는 사도세자의 역에는 유아인, 영조 역에는 송광호가 열연을 하였습니다. 영화 사도는 " 잘하자. 자식이 잘해야 애비가 산다." 재의기간 내내 왕위계승의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우린 임금이었습니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아버지의 듯과는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가 아닐까 한다. 영화 제작에서 이렇듯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영화를 제작하려 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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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82세로 가장 오래 살았고 52년재위했다. 영조는 정성왕후(1692∼1757)ㆍ정순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이씨(1694~1721)ㆍ영빈)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 그 중 5년는 일찍 사망했습니다.

 


첫 아들인 효장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9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영조는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국왕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컷으며, 그는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을 말함-인용자. 이하 같음)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기쁜 마음은 즉각적인 조처로 반영되어,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습니다.

 국왕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했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다고 합니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합니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으며, 천지ㆍ부모 등 63자를 알고 있었고, 판단력도 성숙했다고 합니다.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고 합니다. "비단과 무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으냐"고 부왕이 묻자 "무명이 더 낫다" 면서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하기도 했답니다). 9세 때는 식사 중에 부왕이 부르자 음식을 뱉어내고 대답했는데, [소학]에 그렇게 하도록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세자의 영특함은 부왕과 왕실의 기대를 넉넉히 충족시킬 만 했습니다 . 그러나 세자의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문안인사를 드리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해야 했던 세자는 공부보다는 무예를, 성리학의 교리를 담은 유교 경전보다는 잡학에 관심을 더 갖었고.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호방한 무인적인 기질과 체격을 갖추고 있었고, 활을 소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세자가 영조는 못마땅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그런 세자를 지속적으로 질책과 훈계를 하였는데 세자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극도로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행위를 들어내기도 했답니다. 한중록에는 사도 세자가 내관, 궁녀 등을 잔혹한 방법으로 매질하거나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일 임오화변이 일어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직접적인 계기는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의 고변이었고. 그는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 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고. 이틀 뒤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세자를 죽일 것을 가장 먼저 주청을 드린 사람은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였다고 합니다.그리고 장인인 홍봉한이 앞장서서 집행한 했다고 합니다.

영화사도는 역사적인 여러 측면들을 얘기하면서도 사도세자의 심리상태를 더 중점을 두고 제작한 듯합니다. 영특하게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너무 큰 기대와 훈육이 세자의 기질과 부딛치면서 폭발하는 세자의 행동들, 그리고 아들이기보다는 군주로써 길러지고 있는 외로움,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자식으로 생각했소" 세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것을 바라는 아버지인 왕과 신하들 , 그리고 세자빈, 어머니 영빈이씨, 사도세자에겐 가족이기 보다는 무거운 억압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뒤주에 갇힌지 8일만에 숨을 거두게 되는데요. 왕자로서 형벌이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인 영조는 그 8일 동안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일년이 지났지만 그 때 그 느낌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홍씨는 어떤 사람이었을 까요?

영화사도에서는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죽어가는 가운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버린 여인으로 비춰지는데 어떤 사람인었는지 궁금해지네요.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생모였습니다. '한중록'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녀의 일생을 재구성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팔십여 년의 일생 중 칠십 여년을 삼엄한 궁중에서 생활해야 했던 여인 혜경궁 홍씨, 그녀는 한 많고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기 위해 그녀의 중궁 인생이 녹여진 '한중록'을 집필했습니다.

과거 혜경궁 홍씨의 이미지는 '한중록'에서 묘사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고, 남편을 견디어야 하는 인고의 여성상아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혜경궁 홍씨는 동정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었고, 모진 세월을 똟고 아들인 정조를 왕위에 올린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비운의 여성으로 , 혹은 정조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로 묘사되던 혜경궁홍씨는 최근 들어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성으로 묘사되곤합니다. 영화 사도에서도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인 아닌 노론과 소론의 당쟁속에서 비참하게 희생되었다고 본다면, 노론을 친정으로 둔 혜경궁 홍씨는 과연 누구의 편이었을까요? 역사는 시대에 흐름과 함께 재해석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새자의 아들 정조는 어떠했을까? 사도세자의 아들 입장에서  정조를 이야기 해보기로 합니다.

노론은 집요하게 사도세자를 공격했고 마침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국왕 영조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세자는 신하들의 정치적 책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노론과 반목하면서 소론을 신뢰하는 잘못된 방향을 가고 있엇습니다. 이에 실질적인 노론을 견제할 만한 현실적 힘도 갖추지 못한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큰 반란이 일어나 조선왕조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침내 영조는 1762년 창덕궁 내의 위령전 앞뜰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했고, 이에 사도세자가 땅에 머리를 부딪쳐 이마에서 피가 흘려내리고 허리띠로 목을 맸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자결을 만류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화를 내며 뒤주를 갖다 놓고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고, 한여름 밀폐된 뒤두 속에서 8일 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린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말 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어린 정조의 가슴 깊숙이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정조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삼종의 혈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세자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정조 스스로는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을 꿰뚫고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 만큼 충격이었고 뼛속 깊이 사무치는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정조에게는 평생 불행한 의식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정조는 강한 의지로 불행한 의식을 극복해 나갔지만, 때때로 보여지는 그의 언행 속에서 그 점이 뚜렷이 드러나기도 했고, 그의 정치론 속에도 그와 같은 불행한 의식의 단면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조의 불행한 의식은 특히 사도서자의 능을 방문할 때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정조는 아머지 무덤위에 자란 풀을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구토 증세까지 보이면서 한 없이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한 채 정신을 잃기도 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국왕에 즉위한 후에도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국왕이 된 것이 즐겁지 않다." 이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의식을 드러낸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 후 열흘 후에 죽은 사도세자의 호를 '장헌'으로 높여 부르고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으로 높여 부르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또 그해 8월 영조의 능을 참배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사도세자를 국왕의 어버지로 복원시키고자 했습니다.그렇지만 이런 정조의 뜻은 노론 세력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고, 또 이는 역으로 정조에 대한 반역 또는 암살 위험으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 초지에는 마음대로 사도세자에 대한 애절한 추도의 마음을 표출할 수도 없었습니다.국왕이 된지 13년만인 1789년에 비로소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해서 아믕 속 깊이 남아있던 여한을 풀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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