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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비의 일상/책 리뷰 & 정보

소현세자 –나는 조선의 세자

by 꽃담비 2016. 9. 7.

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소현세자를 아시나요? 얼마 전 김민숙 장편소설 '소현'을 읽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소현세자에 대해 더 궁금해져서 소현세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비운의 왕세자 소현

인조와 일렬왕후 사이에 태어난 '이왕'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왕세자였습니다.그런데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독살당했다는 주장입니다. 소현세자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지만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습니다.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습니다. 

귀국 후 두 달 만에 사망한 소현세자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풍토가 다른 심양 땅에서도 잘 지냈던 세자가 느닷없이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 병에 걸려 사망한 것, 그의 치료를 맡은 이는 이형익이라는 자였습니다.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습니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세자의 죽음에 이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입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시신 상태를 상세하게 묘사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도 했는데(실제로 그 묘사 때문에 독살설 주장에 힘이 실리기도 했음),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인조)도 알지 못하였다.]<인조 23년(조선왕조실록 발췌)>

 

 2 .청나라에 볼모로 간 세자소현

고작 두 달만에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한 병자호란. 거기에서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것도 모자라, 장남 소현세자 내외와 차남 봉림대군을 청나라의 볼모로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굴욕 속에서 '북벌론'이 피어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죠. 아무튼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청이 내건 조건 중 하나였던 '세자의 볼모' 문제였습니다. 다음 왕위를 이어야 할 왕자를 외국에 보내는 문제인 만큼 모든 대신들이 힘을 모아 않된다고했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청의 요구를 골라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우왕좌왕하던 그 때, 총대를 맨 것이 바로 소현세자 자신이었습니다. 이때 소현세자가 스물여섯, 그리고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열아홉. 그들은 창창한 나이에 조선 땅과 기약 없는 이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습니다.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습니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고 심관은 양국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심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고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내기도 했습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습니다.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고.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 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습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고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습니다. 1644년 마침내 청은 북경을 차지했습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3 .소현세자 고국으로 돌아오다

.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에서는 세자를 귀국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애당초 세자 부부와 대군 부부를 끌고 간 이유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 명나라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는데 그 명나라가 사라져버렸으니 굳이 그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사라졌거든요. 타지 생활을 하던 소현세자에게는 꿈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고국에 있는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들의 귀환 소식에 "청이 세자를 돌려보내는 이 조치에 정말 다른 마음은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부터 했다고 할 만큼, 이미 아버지로서의 그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인조는 다른 나라로 끌려가서 일 잘 하고 있는 아들 보며 왜 불안을 느낀 걸까요. 인조는 조선인 포로들을 확보해 인망을 얻더니 청의 고위 관리들과도 친분을 쌓고 외교 능력을 발휘하는 아들. 그리고 수틀리면 '니 아들을 왕으로 세울 수도 있어'라며 불안을 조장하는 청의 태도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내 아들이 날 쫓아내고 왕이 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과 의심을 품게 됐을 겁니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활발한 행보도 그런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현세자는 귀국할 때 서양의 서적과 과학기기 및 천주교에 관련된 물품들을 가득가득 실어 갔다고 해요. 그리고 1645년, 그들은 마침내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됩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서. 그러나 이 기념품을 싸들고 돌아온 세자 부부에게 쏠린 눈길은 냉랭하기 그지 없었지요. 그들의 눈에 소현세자 부부는 새롭게 뭔가 배워온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적국에 붙어 변심한 사람들일 뿐이었으니까요. 결국 그들은, 겨우 돌아온 조선에서 처절하게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아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습니다.소현세자는 인조의 냉담한 환대 속에 귀국했고, 그가 가져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불쾌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고 결국 소현세자는 가져온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黃金) 19냥을 호조로 돌려 보냈습니다.

4. 인조의 비정함

인조는 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에 임금의 관을 의미하는 글자도 못 쓰게 하고, 부덤도 '원' 대신에(태자의 묘를 지칭) '묘'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도 모자라 상복 착용도 본래 1년은 입어야 하는데 1주로 파격 단축. 이 사태를 보고 대신들은 부당하다며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고, 이후 세자의 묘를 절대로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자가 갑작스레 죽었으니 그 뒤를 이어어야 할 것은 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라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이 되어야 했으나 인조가 세자로 세운 것은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이었습니다. 이건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반발이 일었으나,인조은 강행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세자빈에게도 닥쳤습니다. 1646년 1월 3일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고 인조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했습니다.이 사건은 강빈을 죽이려는 모함에 불과했고 이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결구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어린나이에 청에 볼모로 끌려가 왕세자로의 당당하게 위엄을 지켰고 자신의 백성들을 구해내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그러나 인조의 피해망상으로 안타깝게 그의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은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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