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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비의 일상/책 리뷰 & 정보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by 꽃담비 2016. 10. 7.

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얼마전 덕혜옹주를 스크린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는데요. 몇 해전 책으로 읽었던 덕혜옹주를 생각하며 영화가 상영되면 꼭 봐야지 기리리다 거의 끝날 무렵에야 봤네요. 

"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 해도 나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이다." 우리의 역사는 참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그리고 명성황후 등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해서 이런 슬픔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영화 덕혜옹주는 손예진님이  맡아 연기를 한다고 해서 더욱 기다렸네요. 워낙  손예진님의 연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기대해도 좋은 듯 했어요. 특히 투자도 했다고 하니 더욱 더 열의를 갖지고 했으리라 생각이 드네요. 영화이야기는 다음 편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오늘은 덕혜옹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고종의 막내 딸 덕혜옹주

고종의 막내딸로 1912년 5월 25일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 있던 고종의 늦둥이달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었던 복녕당 양씨귀인이었습니다. 고종에게는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되기전에 사망하였기 대문에 덕혜옹주는 고종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당시 고종은 덕혜의 출생이후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려오기도 했을 만큼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1916년 4월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에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어서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이곳에 다니게 했답니다.

준명당의 건물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함녕전과 준명당의 거리는 짧았지만 가마를 타고 등교했으며, 유모 변복동이도 수행했다고 합니다.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환갑에 얻은 귀한 딸이었고 외동달리 었으므로 애지중지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그렇듯 어린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 만큼 깊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고종의 죽음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할 당시 덕혜의 나이는 이제 겨우 8살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슬픔 말고도 고종의 죽음은 덕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고종이 승하 후 덕혜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덕혜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했습니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이때에 이르러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려 졌었습니다. 덕혜옹주 학창시절은 당시 함께 다니던 급우들의 말에 의하면 '옹주는 왕족다운 기품을 갖추고,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머리는 한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뒹세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하게 늘이고, 일본 옷에 하카마를 입고 학교를 다녔으며 도한 항상 상궁과 마차를 타고와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수업중에는 항상 교실 뒤어서 상궁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옹주는 공부를 잘 하였으며 습자에 능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요도 잘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생활도 잠시 덕혜의 불운은 일본인 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제는 영친왕에 그랬듯이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습니다.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에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하게 됩니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빵니 영친왕과 그 붕니 이방자가 거쳐하던 집이었습니다. 방방자 수기에 "덕혜옹주가 도착한 날 밤 그의 침대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잠든 앳된 얼굴에 애수가 서려 있었서 나도 므로게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며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어찌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집에서 여자학습원에 다녔습니다. 당시 덕혜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묵음이 일제의 독살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다시 떠났습니다.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때에 참석이 허락되었습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사망하여 덕혜옹주는 구ㅟ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후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덕혜옹주의 정략결혼

덕혜옹웆의 결혼 전에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 기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 193년 10월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습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카라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 이었습니다. 왕공족의 혼사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왕공가궤법> 제 119조에 따라 1931년 4월 14일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내려졌고 같은 해 5월 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옹주의 혼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고 그녀의 혼인이 확정되다 옹주의 신하와 옛 친척들은 많은 반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옹주는 결혼 장초부터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1932년 옹주는 딸 마사에를 낳았고 출산 이후 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 부터 마쓰자와 도립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답니다. 입원이 장기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 성씨인 양과 봉호인 덕혜를 조합해 '양덕혜'일가를 창립하였답니다. 이혼 후에 소 다케유키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고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 문화학원의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의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 전후작에게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했다고 합니다. 1956년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을 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답니다.

그리운 고향땅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속에서도 덕혜옹주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고국의 궁권로 돌아가길 원했다고합니다. 이 무련 서울 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옹주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뱍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무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1962년 1월 26일 3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14세의 꽃다운 수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입니다. 당시 일간지에서는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는 강제 결혼을 하게 되자 모드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기록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이방자와 낙선재에서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만년을 보내다 1989년 4월 21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다짐과 조선 황실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입니다.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기에 역사의 결량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아픔을 기억하며 낙선재를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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