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꽃담비입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친구랑 남한산성에 다녀왔어요. 남한산성은 산성행궁의 주변 한옥들과 성곽길이 좋아 자주가는 편인데 그곳에 가을 햇살을 느끼며 느릿느릿 걷노라면 옛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합니다. 오늘은 그곳에 들러 행궁 주변을 둘러보고 남한산성에서 잘하는 두부전골도 먹었네요. 그런데 그렇게 자주 다니던 곳이었는데 그곳에 초등학교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골목록목을 걷다보니 초등학교가 건물들 사이에 빼꼼히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학교에 들러 학교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다 왔어요. 이렇게 멋진 산성은 어제부터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남한산성을 알아보았어요.
남한산성유래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1392년~1910년)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입니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 차례 축성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답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고,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입니다.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습니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누·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승군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으며,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인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 또는 이궁으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습니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 73칸, 하궐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산성호텔 뒤편의 언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 영조,정조가 영릉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938번지에 있습니다.
수어장대
일명 서장대라 불리는 수어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동서남북에 세운 4개 장대 중 으뜸가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입니다.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목조건물 2층집입니다. 위치가 산성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 높이 453m. 남한산성은 낮이 가장 길다고 해서 일장산이라 했답니다. 정상이어서 성내는 물론이고, 멀리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의 풍광이 시원스레 보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멀리 인천의 낙조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40일간 머물면서 직접 군사를 지휘·격려하며 피나는 항전을 했던 곳입니다. 당초에는 수어청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인데, 이때는 단층 누각이었다.후에 영조는 왕명으로 2층 누각을 짓게 하고, 바깥쪽 편액을 수어장대, 안쪽 편액을 무망루라 하였답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효종의 원한에 찬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랍니다. 영조와 정조는 여주 영릉의 효종 능묘를 참배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이곳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잊을 수 없는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합니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익공계 팔작지붕이고, 1층 평면은 내진과 외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내진부에는 전돌을, 외진부에는 긴 마루를 깔았고, 낮은 축대 위에 한 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놓았으며, 기단 전체는 자연석을 허튼층 막돌쌓기로 쌓았습니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의 둥근기둥이다. 천장은 높은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으니 한결 시원하고 견고하게 보입니다. 위층은 창을 내고 매칸 마다 2짝 판문을 달았으며 모로단청을 하였습니다.이곳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입니다.
청량대
서장대를 돌아 돌계단을 내려오면 오른편에 아담한 당우 청량대가 있습니다. 청량대의 주인공 이회에 얽힌 사연이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회는 남한산성 축성 때 남쪽 부분 공사를 맡았다. 어느 날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모략을 받고 사형대에 오르게 되었고, 이회는 변명 한마디 못 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답니다. 다만 "무릇 일이란 사필귀정이니 내가 죽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게 죄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매가 오거든 나에게 죄가 없음을 알라" 하는 유언 한마디를 남기고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회가 절명하려는 순간 과연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사형대 옆 바위에 앉아 이회의 마지막을 슬프게 바라봤다고 합니다. 이회는 죽고 '공사비 횡령' 사건은 다시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회는 결국 누명을 벗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이회가 죽을 때 매가 앉아 지켜보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른답니다. 한편 남편의 임무 완수를 빌며 행상으로 공사비를 보태고 있던 이회의 아내는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무룡도(舞龍島) 앞바다에 몸을 던져 이생을 마쳤다고합니다. 이회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청량대는 산성 축성 당시의 공로자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초상을 안치해두었는데, 한국전쟁 때 대부분 없어졌다고 합니다.
동문과 남문
동문과 남문 동문은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원래 이름은 좌익문입니다. 일반적인 성문구조로 되어 있으며, 거칠게 다듬어진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하고 면만 바르게 쌓았으며, 문루는 초익공계 양식을 따랐고, 팔작지붕에 홍예문을 두었습니다. 문루 오른쪽에는 지형에 따라 층단을 두고 석축을 쌓았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으며, 정조 2년(1778)에 개축·보수하였습니다. 남문은 산성의 남쪽 문으로 본래 이름은 지화문입니다. 지화문 앞에 서면 성남시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지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산성리 마을이 조망됩니다. 지화문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좌우로는 막돌쌓기로 자연석을 평줄운에 맞춰 높이 쌓았습니다. 위로 올라가면서 석축면에 구배를 두어 점점 안으로 옥아들게 한 것은 높은 성벽의 안전도를 염려한 때문입니다. 윗부분 여장에는 총안을 설치했고, 문루는 장주 초석을 세우고, 역시 초익공계 양식의 팔작지붕입니다.
정경사와 국사봉
장경사와 국청사장경사는 산성 동문에서 2㎞ 가량 올라가 우거진 숲속 터널을 몇 굽이 돌아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울 근교 사찰로는 드물게 한적하여 깊은 산사와 같습니다. 전란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었던 승군. 또다시 전국의 승려들이 승군으로 동원된 것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이 축성되면서였습니다. 승려들은 먼저 성을 쌓는 일에 가담하게 됩니다. 인조는 이듬해 승도청인 남한치영을 산성 안에 두고 팔도도총섭절제중군주장에 각성대사를 임명하여 각 도의 승군 동원과 감독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에 승군은 성이 완성된 후에도 수도방위 임무를 부여받고 필요한 훈련을 하며 계속 주둔해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를 비롯해 이 무렵 새로 건축된 개원사·한흥사·동림사·국청사·천주사·남단사·장경사 등 남한산성의 9개 사찰은 팔도의 승군들이 머물렀던 호국의 의지가 담긴 절들이었습니다. 몇몇 절들은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폭파했다는 설이 지배적이고, 당시 폭발음을 들었다는 주민의 증언도 쉽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9개 사찰 중에서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온 절은 장경사 하나뿐입니다. 장경사에는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은 대웅전 건물과 요사채 3동이 있습니다. 산성 축성 때 세운 국청사는 일제 때 폭파당하고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68년 보운 승현화상이 재건했으며, 최근에 망월사가 복원되었습니다
숭렬전과 현절사
숭렬전과 현절사 숭렬전은 산성의 서문 안 일장산 중턱에 있는 전각으로, 원래 백제의 시조이며 남한산성을 처음 축조한 온조왕의 넋을 기리는 초혼각이었습니다. 여기에 인조 4년(1626) 남한산성 축성에 힘쓰고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병사한 수어사 이서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 편액이 내려졌습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입니다. 현절사는 삼학사로 불리는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사당으로 동문 안 북쪽에 있습니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청나라에 강제로 잡혀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갖은 회유를 받고도 끝내 굴복하지 않아 참형을 당했답니다. 숙종 14년(1688) 이곳에 현절사를 짓고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는 사당으로 삼았습니다. 숙종 25년(1699)에 이르러 삼학사와 함께 청에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김상헌·정온 두 충신도 이곳에 모셨습니다. 척화파·주화파를 떠나 진정한 충신이었던 이들의 넋이 오늘도 남한산성과 수도 서울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현절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입니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습니다. 연간 방문객 280만 명. 단위면적당 방문객으로 따지면 국내에서 최고 수준입니다. 남한산성에 탐방객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도권과 인접한 탓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바로 시작되는 성곽길 탐방로가 걷기에 편한 까닭입니다. 남한산성 탐방로는 크게 5코스로 나뉩니다.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맞춤코스이며, 중간 중간 나 있는 샛길을 이용한다면 코스는 입맛대로 더 다양해집니다.
거기에 성곽 탐방로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를 꺼내 곱씹는다면 남한산성은 한나절 나들이만으로도 여행 허기가 단숨에 해결되는 걷기코스가됩니다. 올 가을엔 남한산성을 걸으며 성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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